경북 산불이 꺼진 지 닷새가 지났지만 돌아갈 집과 재산을 잃은 이재민들은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화마 속에 간신히 집을 지킨 주민조차 잿더미와 함께 지내며 쉬이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기 어려워 한다. 피해 지역에선 아픔의 신음과 함께 희망을 간절히 바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잿더미에서 탄내 계속…화재 충격에 사망한 주민도 있어
폐허가 된 안동시 임하면 신덕1리 마을. 정진원 기자2일 찾은 안동시 임하면 신덕1리 마을은 '괴물 산불'이 휩쓸고 간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마을 뒷산은 까맣게 그을렀고, 나무는 가지만 앙상하게 남았거나 몸통이 꺾여 땅에 쓰러졌다.
산 바로 밑에 있던 주택들은 대부분 전소됐고 창고가 무너져 내렸다. 비닐하우스는 녹아내렸고, 어르신들이 타던 전동휠체어와 농기계도 불에 타 뼈대만 남았다.
60대 마을 주민 A씨는 집 주변에 물을 뿌려 가까스로 집을 구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A씨는 "3월 25일 오후 5시 반에서 6시 사이였던 것 같다. 남편이랑 마당에서 계속 집 주위에 물을 뿌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두워졌고 벌건 불이 넘어오는 게 보였다"고 회상했다.
A씨는 약 10분 만에 불이 번져 황급히 차를 타고 대피했고, 이 과정에서 날아온 불씨에 화상을 입었다며 팔에 난 화상 자국을 보여줬다.
A씨는 집을 건졌지만 불과 50미터가량 떨어진 농협 농산물 공동선별장 건물과 한옥 학교 건물은 모두 화마에 스러졌다.
A씨는 "바람이 불 때마다 그을음이 남은 잿더미에서 매캐한 냄새와 먼지가 날린다"며 하루빨리 무너진 건물들을 철거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산불로 망가진 부모님의 집을 청소하기 위해 2주간 휴가를 내고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왔다는 40대 남성 B씨는 "저희 동네가 한 60% 정도 소실이 됐다고 보면 된다. 괜찮다고 하는 집들도 유해가스가 전부 창문 틈으로 다 들어가서 피해를 보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B씨는 "아랫집 같은 경우에는 아프신 어르신이 화재로 충격을 받아 이틀 만에 돌아가셨다고 전해 들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기약 없는 대피소 생활…임시주택 마련까진 한참 기다려야
폐허가 된 안동시 임하면 신덕1리 마을. 정진원 기자신덕1리 마을 인근에 위치한 안동시 임하면 복지회관에는 산불을 피해 대피한 임하면 주민 50여명이 일주일째 머물고 있었다.
총 16명이 함께 지내는 건물 2층, 남성 대피 시설에서 만난 구인섭(72)씨는 "식구와 함께 몸만 튀어나오고 개도 타 죽고, 염소도 타 죽고, 닭도 다 타 죽었다. 짐을 챙길 시간도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신덕1리 이장인 C씨도 "사과밭이 다 타서 몇 년간 수확이 불가능하다"며 허망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바로 옆 건물에 마련된 여성 대피소에는 약 30명이 30평 남짓 규모의 방 한 칸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 지내는 탓에 한 명이 기침을 하면 뒤이어 또다른 어르신이 기침을 이어 받았다.
고곡리 주민 김모(69·여)씨는 "마을 절반 이상이 불에 탔다. 밭에서 일하다가 집에 있던 통장도 들고 올 새도 없이 다 놔두고 이웃의 차량을 얻어타고 대피했다"고 한탄했다.
그러면서 "몸만 빠져나왔는데 밭에서 일을 하려면 연장을 다 다시 사야 한다. 호미 하나도 없다"고 막막한 심정을 털어놨다.
지자체가 임시주택을 마련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지만 피해 조사에만 약 한 달이 걸리는 상황. 주민들은 한동안 대피소 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거동 불편한 요양원 입소자들도 기약 없는 피난 생활 중
효마을 1층 거실에서 재우요양원에서 대피한 어르신 7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정진원 기자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악의 산불에 요양원도 피난길에 올랐다.
재우요양원 입소자들은 불길이 번지기 직전 같은 안동 내 다른 요양시설로 대피해 화를 피했지만 냉난방시설이 모두 망가져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26명의 입소자들은 이웃 요양시설 1층을 빌려 사용 중인데 방이 부족해 7명의 어르신은 거실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
각각의 침대가 거의 붙어있는 정도로 가까웠고, 거실 중앙에 설치된 가림막이 성별을 구분했다.
대피 온 입소자들이 대부분 고령에 혼자서는 거동이 불편하고, 도움 없이는 의사 표현도 어려운 어르신들이어서 대피 생활은 더욱 어렵다.
건은연(62·여) 재우요양원 원장은 "건물 외벽이 다 불에 타서 청소 비용과 외벽 공사, 폐기물 처리 등 때문에 최소 1억 원이 소요될 것 같다. 요양원 건물 옆에 있던 사택은 전소됐다"며 피해가 막대하다고 말했다.
건 원장은 "건물을 보수하는 대로 돌아갈 계획이지만 한 달 이상 걸릴 것 같다. 지금 와 있는 시설에서는 원래 시설만큼 어르신들을 돌볼 수 없는 상태고, 언제까지 여기에 신세를 져야할지 모르겠다"고 막막함을 토로했다.
화마에 건물 입구가 무너져 내린 재우요양원. 건은연 재우요양원 원장 제공화마가 남긴 상처는 더디게 회복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날 무너진 현장의 곳곳에서 다시 희망과 생동이 꿈틀거리는 모습이, 공동체의 강인한 결속력이 엿보였다.
임하면 신덕리 주민들은 힘을 합쳐 불에 탄 비닐하우스를 손봤고 복지회관에 대피한 주민들은 함께둘러 앉아 지은 밥을 나눠 먹으며 고통을 나눴다.
대피한 요양원 소속 요양보호사들은 평소와 다름 없이 어르신들을 지극 정성으로 모시며 다시 일상을 회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전했다.